글씨를 참 못 쓰는 편이지만, 부드럽게 써지는 만년필이 참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맨 처음은 아마도 중학교 시절 펜으로 영어 알파벳을 처음 쓰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만년필 쓰면 글씨체 망가진다고 못 쓰게 했었죠. 정말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만년필이 펜보다 선이 굵고 잉크가 술술 잘 나오다 보니 대충 써도 잘 쓴것 처럼 보여서 그런 걸까요?
중학교 시절 제 주위에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빠이롯트(PILOT), 파커(PARKER)였었는데 만년필을 직접 쓰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돈벌이를 위해 만년필에 관심있는 친구들도 있었죠. 파커 만년필 중에 촉이 백금으로 된게 있는데, 이걸 업자가 무려 만원에 사준다는 거였습니다. 그 당시 만원이면 참 큰 돈이었는데, 내가 쓸 만년필 한자루 없는 처지에 백금촉 만년필이라니 구경이라도 해보면 좋겠다 싶었네요. 만년필을 가지고 싶다고 하도 졸랐더니 아버지께서 하나 사주시긴 했는데, 어디서 만든 것이지 모르는 시장표였고 툭하면 잉크가 막히거나 줄줄 새거나 해서 어느샌가 쓰레기통에 들어가버렸었네요.
얼마 전에 갑자기 만년필 생각이 나서 이런 저런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동네 문구점에 1개 남은 파커 벡터 만년필을 사서 써보았는데, 2만원 정도 가격치고는 꽤 훌륭한 필기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커가 미국에서 만년필을 대중적인 필기구로 널리 알렸다고 하는데, 51 모델이라는게 굉장히 유명하다고 해서 보니 일명 '후드닙'이라고 해서 잉크 증발을 막기 위해 닙의 노출을 최소화 했다고 합니다. 모양을 보니 중학교 시절에 이걸 가진 친구가 있던 기억이 났습니다. 빌려서 써봤을 때 굉장히 느낌이 좋았던 기억도 났구요.
이 모델을 아직 판매하나 싶어서 찾아봤더니, 이제는 만들지 않나봐요. 대신에 중국에서 복각(?) 비슷하게 만들고 있더라구요. 이번에도 알리의 힘을 빌어서 아주 저렴하게 배송받았습니다. 4~5달러 정도면 배송비 포함해서 만년필 한자루를 사네요.
여러가지 컬러가 있었는데, 플라스틱보다 나무재질이 이뻐보여서 이걸로 구매했습니다. 받아보니 괜찮네요.
옛날에 친구꺼 써보고 가지고 싶었는데, 30년도 더 지나서 이제야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파카 제품은 아니지만...
벡터 만년필은 떨어뜨려서 그런건지 플라스틱 뒷 뚜껑에 크랙이 가서 순간접착제로 때워놨는데, 이것은 나사부분을 황동같은 금속으로 임플란트 해놨네요. 가성비가 아주 훌륭합니다.
컨버터의 퀄리티도 꽤 좋습니다. JINHAO 가 양각으로 새겨져있네요. 5천원이 안되는 필기구에 감동하는 중입니다.
파커 벡터에는 터키시 블루 잉크를 넣어서 쓰기에, 이놈을 위해서 검정색 잉크를 하나 샀습니다. 잉크가 만원이 넘네요. 만년필보다 비싼 잉크라니... ㅎㅎ
후드닙의 탄생 배경이 바로 이 빨리 마르는 잉크때문이라고 하더라구요. 다른 필기구 대비 만년필의 단점이 잉크가 늦게 말라서 손이 닿거나 하면 번지는 것인데, 빨리 마르는 잉크를 개발했더니 만년필의 닙에서도 빨리 마르는 바람에 뚜껑을 열고 조금만 있어도 잉크가 안나와 버리는 것이었겠죠.
사인할 때 쓰는 만년필이 아니라 일상적인 필기구라면 멋보다는 실용성이기에 이런 디자인을 채택했을 것 같습니다.
파카 벡터는 F닙인데 술술 잘 써져서 좋지만, 살짝만 얇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일 얇은 0.38mm Extra Fine 을 주문했습니다. 글씨 굵기는 어떤지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작고 단단한 파커 벡터에 비해, 다소 뭉툭하고 부드러운 51A입니다. 좋은 제품을 찾은 듯 하여 기분이 좋네요. 자꾸 종이에 뭔가 써보고 싶은 충동이 드네요.